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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변화에 목마른 요즘.

요새는 회사 생활이 조금 지루합니다. 한 회사에 어느정도 오래 있다보면 지루해지는건 당연하겠지만, 한국에서 느끼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달리 표현하면, 뭔가 슬슬 애매한 포지션이 되어 가는 것 같고 발전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것이 느껴집니다. 작년에 Senior로 승진하고부터는, 맏는 일들에 점차 디자인과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는데, 둘다 내가 한국에서 겪었던 것들과는 매우 다르게 다가와서 부담스러운데다가 언어적인 장벽이 더욱더 크게 느껴지네요. 그러다보니 일을 팍팍 추진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반동안 구현한 인크립터 서버가 있습니다. 외국에서의 경험도 얼마 없는데 이정도 규모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다수의 팀원들과 함께 맨바닥부터 개발하게 된걸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했지요. 주도적으로 이것저것 제안하고, 핵심 파트 디자인도 자처해서 하면서 참 즐겁게 일했습니다. "영국에서도 뭐 통하네 하하하" 하면서 자만하기도 하구요. 이 프로젝트 덕분에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고 참 운이 좋았지요.


두달전쯤, 미디어프로세서 팀에서 우리 인크립터를 stand alone 이 아니라, API 처럼 사용하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내부적으로 많은 회의가 있었습니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에 어디까지 지원해 줄 수 있는지부터가 이슈였지요. HTTP request에 따라 이벤트가 시작되고, Boost ASIO를 기반 thread pool에 의해 구동되는 완전한 비동기 시스템인데, 이를 동기화된 함수 호출해서 결과를 return 받는 형태로 쓰고 싶다고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여러가지 상황이 다르고 해서 언뜻 보면 쉬울것 같다가도 엄청나게 불합일한 경우들이 계속 발견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좀 지루했기도 했고 워낙 이런류의 프로젝트를 좋아하는지라, 제가 하고싶다고 자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재밌었지요. io_service trick을 이용한 나름 수려한 wrapper를 만들고, 기존 코드의 세세한 부분을 조금씩 조금씩 확장해가는 재미에 푹 빠져서 한달은 훅 간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새 정체기 입니다. stand alone과 API 양쪽 지원에 따른 디자인 원칙이 계속 충돌하고, 해결책은 있으나 저는 이를 결정할 만한 권한이 없다보니 처음에는 여러가지 안을 내서 제안해보고, 설명하고, 재촉하고 바둥바둥 했습니다만, 결국 약간 정치적인 이슈와 힘겨루기도 한목 하는듯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네요. 우리 시스템에 적합한 안을 내면, 미디어프로세서 팀에서 거부하고, 반대로 하면 우리쪽 컨설턴트가 안된다고 하고. 중재는 되지 않고, 그렇다고 밀어부칠 권한은 주어지지 않고. 참 답답합니다. 그렇다고 매니져에게 이런 상황을 요목조목 설명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그 느낌의 전달이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영어는 큰 장애물입니다. 미디어프로세서 팀이 미국에 있어서, 메일과 컨퍼런스 콜로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제 영어가 부족해서 전화상으로 디서커션에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알고리즘의 복잡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계속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해줘도 그들은 이해를 못하고, 그들이 계속 설명하는건 내가 이해를 못하고. 화이트보드라도 가져다놓고 옆에 서서 하면 좋을텐데 여건이 안되니까 정말 답답하네요. 원어민이었다면 훨씬 쉽게 결론을 낼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이런 페널티를 가지고 외국에서 일하는걸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는걸까, 오히려 커리어에 방해가 되는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도 종종 엄습하구요. 운좋게 기회가 주어졌는데, 영어때문에 치고나가지 못하는것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진정한 실력자라면 언어의 장벽도 뛰어넘겠지만, 저는 한참 모자라다보니 굉장히 버거운 싸움으로 느껴집니다.


구현 하는건 문제가 아닌데, 디자인이 정해지지 않아서 손놓고 있는 상태.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아침 미팅때마다 진행사항 보고할게 없는것도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프로그래밍 스킬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서 미친듯이 디자인하고 코딩 쫙 쫙 해내고, 보란듯이 결과 내고 프리젠테이션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이곳 대학 도서관에 다니고 있습니다. '도서관 공부' 같은건 해본지 너무 오래되어서, 몸 근질거리고, 졸리고 머리아프지만 익숙해지길 바라며 하루하루 더디게나마 알고리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보인다고 믿으니까요. :-)